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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 Strangelove

* 이 글은 완전한 허구입니다. 실제 인물, 단체, 아무튼 기타 등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 약간의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fate of all mankind I see, is in the hands of fools.

-King Crimson, <Epitaph>

 

1. 모래, 모래, 더 많은 모래.

 

“뭐 찾은 거라도 있어?”

 

“아니, 전혀.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여긴 거대한 쓰레기장 같아.” 헤드폰을 통해 노이즈가 섞인 답신이 돌아왔다. 여긴 최악이었다. 방사능 계수기는 쉴 새 없이 삑삑거리지, 제멋대로 널린 잔해 덕에 호버크래프트나 버기는 번번이 고장나지. 지금까지 세 번을 왔고 매번 다른 곳-이번은 이 행성 북반구 어딘가였다-에 강하했는데,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똑같았다. 사막과 가끔 보이는 죽은 민둥산들, 그리고 잔해들. 모래투성이의 바닥을 조금만 파 보면 유리의 층이 반겼다. 행성의 모래와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유리는 끔찍하게 단단해서 우리가 가져온 장비로는 뚫을 수도 없었다. 엄청나게 큰 굴착기로 뚫지 않는 이상에야. 대륙 언저리는 전부 낭떠러지라서, 한번 떨어지면 기어 올라오기도 어려워 보일 정도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불어 닥치는 모래바람 덕에 해가 보이는 날도 드물고, 자기장도 이상해져서 가끔은 나침반까지 제멋대로 돌곤 했다. 사방에 방향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것은 태양밖에 없는데, 해도 없고 나침반도 맛이 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우린 본의 아니게 해 뜨자마자 나가서 해 지기 전에 들어오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쓰레기장이라고? 차라리 쓰레기장이었으면 좋겠네.” 그렇다. 만일 쓰레기장이었다면 이 길고 지긋지긋한 탐사도 진작에 끝났을 테니까. 우리는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지적 생명체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 보여줄 법한 흔적을. 지금까지 찾아낸 건 기껏해야 폐자재 정도였고, 그건 고향으로 돌아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로 며칠이지?”

 

“가서 확인해봐야지. 오늘은 이만 복귀하는 게 좋지 않겠냐.” 나는 이미 베이스캠프 쪽으로 발길을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분홍빛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풍경과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어디서 갑자기 솟아나온 것 같은 느낌까지 들게 했다. 왜 하필이면 분홍색 도료냐고? 그게 제일 값이 쌌거든.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에어록과 살균기니 뭐니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놈들을 지나서 음압을 풀었다. 공기가 급격히 밀고 들어오며 ‘쉿’ 소리를 내자,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슬슬 방호복도 위험하겠는데. 매일같이 저 모래바람이랑 닿는데 구멍 하나 둘쯤은 생겼겠지. 여벌 아직 하나 남았지? 이봐, 듣고 있냐? 도착했어?”

 

“방호복이라면 구석에 한번 봐. 숨넘어가겠다 임마. 천천히 좀 말해라.” 동기가 말했다. 그는 베이스 캠프의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연락했을 때는 이미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소화기관을 통과해도 그리 성상이 바뀌지 않는 식량 튜브를 쭉쭉 빨고 있었다. “하나 먹을래? 그건 그렇고 메시지 왔다.” 나는 그가 건넨 튜브를 받아들었다. 새삼 이딴 걸 지금까지 잘도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460일하고도 나흘째 먹고 있었는데, 그렇게 먹어도 줄어들 생각을 하질 않으니 이제 소름까지 끼쳤다. 아무리 두 사람이고 식사량이 적어도 말이지.

 

“뭐라디?”

 

“슬슬 영감쟁이들이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 같다면서, 다음 달까지도 성과 없으면 각오하라던데.” 나는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꽤 괴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이전까지의 결과를 봐서 알듯이 작은 비행정 하나는 필요하지 않겠냐고 물어봤을 때였지. 영감쟁이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다가 부숴먹으면 자네들 돈으로 낼 텐가? 요즘 젊은 것들은 근성도 없고! 어! 하여간! 어! 우리 젊을 때는 대기권 진입도 목숨 걸고 그랬어! 호버크래프트나 버기는 있었는 줄 알아? 그런 먼 행성까지 가는 것도 회사 돈으로 하는 거 알아, 몰라! 어! 변변찮은 장비로 열심히 했지! 어! 근데! 너희들은! 어! 빠져가지고!”

 

우리가 이 쓸데없이 넓기만 한 행성을 누비다가 다리 알통이 터져서 죽으면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뭐, 불평만 잔뜩 늘어놓기는 했지만 영감들이 조바심 내거나 장비에 인색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투자자들 등쳐먹어서 겨우 긁어모은 자본으로 온 거니까. 앞선 두 번의 탐사로 회사 사정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지 오래였다. 둘밖에 못 온 것도 이번에 긁어모은 돈으로는 코딱지만 한 탐사정밖에 못 구해서 그런 거고.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런 장비로는 영감들은 물론이고 우리까지 늙어죽을 때에도 아무 것도 가져오지 못할 거다. 나는 잠들기 전에, 너무 읽어서 책등에서 종이가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책을 폈다. 네 바닥도 넘기기 전에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2. 옛날 옛적에 

 

나는 싸구려 다이너에서 이미 다 식어가는 커피를 앞에 두고 기도했다. 물론 그렇게 해 봐야 60억 인류를 위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밖의 대로에서는 차들이 나아갈 줄 모르고 가득 밀려 있었다. 뭘 생각하는지도 모를, 무표정한 사람들이 쇼 윈도우 밖을 지나갔다. 몇 시간 뒤에 무슨 일이 있을 줄도 모르고. 나는 벗어놓았던 페도라를 다시 쓰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국방성.” 택시기사는 내 쪽을 흘끗 보고는, 다시 운전대로 돌아갔다. 택시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한 교통 정체 끝에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쥐어주었다.

 

“거스름돈은 가지세요.”

 

“별 꼴이군. 댁 표정은 왜 그러쇼. 내일 지구라도 망하나? 젊은 양반이 벌써 그러면 안 돼. 어깨도 좀 펴고 다니고, 얼굴에 웃음 좀 띄워 봐.” 택시 기사가 말했다. 나는 어제 먹다 남은 베이글처럼 딱딱한 미소로 화답하며 그를 보냈다. 그리고 수많은 검문소와 엘리베이터를 지나,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까지 알았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엉뚱한 곳에 화풀이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체념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안의 분위기는 후자에 속했다. 엉덩이 큰 높으신 분들이나, 높으신 분들 가족들, 그리고 마지못해 들인 것처럼 보이는 셀터 관리자들은 모두 멍하니 앉아 전등이나, 모니터나, 돌아가는 환풍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다가 이제야 왔어? 핸드폰도 꺼 두고. 몇 시간 남았나?” 높으신 분 하나가 물었다. 국방장관이었다. 가슴에는 훈장이니 약장이니, 막상 모든 것이 불꽃에 휩싸이고 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길어야 세 시간요.” 좌중은 약간의 한숨 말고는 큰 반응도 없었다.

 

“빌어먹을! 하여간 이래서 어린놈들은 안 돼. 생각도 없고, 사명감도 없고, 부적절한 행동이 뭔지도 모른다니까. 업무시간에 뭘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몰라!” 그는 은근슬쩍 나와 비서실장, 그리고 전속부관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한 마디 쏘아주려고 했지만, 전속부관이 더 빨랐다.

 

“그거 댁이 본 거잖아. 아니라도 거기 앉아계신 분 중 하나가 범인일걸?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안 돼. 우리 컴퓨터에는 그런 중요한 정보도 없고, 댁들보다 관리는 더 철저히 하거든. 그래, 예를 들면 업무 중에 동영상이나 본다던가, 그런 쓸데없는 짓은 안 한다고.” 그는 이어폰을 꽂고, 다리까지 꼬아 흔들고 있었다. 장군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건방진 놈이......! 상관모독은 중징계라는 거 알고 있겠지!” 장관이 말했다. 부관은 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고는, 세게 밀쳐 넘어뜨렸다. 모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장군은 완충재를 덧댄 바닥에 넘어져 신음했다.

 

“상관? 징계? 웃기고 있네. 이제 와서 계급이 무슨 소용이야. 이 알량한 자리가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고.” 부관이 모자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계급장 떼고 한판 붙자, 똥구멍에서 흘러나와서 퍼질러진 토사물 같은 새끼야!” 소란이 커질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싸움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 멍청이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구석에 있는 모니터를 켜 바깥 모습을 봤다. 조금씩이지만 혼란의 씨앗이 여기저기서 싹트고 있었다. 아나운서는 아직 '불확실한 정보'라는 말로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지만, 몇 시간 뒤면 그 '불확실한 정보'는 '지금까지 저희 뉴스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바뀌겠지.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여기는 이제 닫힌 상자였다. 밖에서 지키고 있는 믿음직스러운 군인들이 언제 폭도가 되어 밀고 들어오려고 하더라도 관계없는 그런 곳. 나는 국방장관이 내는 신음과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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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역전 2012.11.11 02:28
    으음, SF철학물인가요 이건?
  • profile
    욀슨 2012.11.11 04:22
    SF는 맞는데 철학은 잘 모르곘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rofile
    역전 2012.11.11 05:28
    '카산드라의 거울' 느낌이 왠지모르게 느껴져서 철학쪽도 섞여있나 했습니다만
    아니었던듯 싶군요
    풍자가 언제 끼어도 괜찮을 법한 분위기의 이야기네요.
  • profile
    욀슨 2012.11.11 12:08

    베르나르의 책이군요. <신> 이후로는 그의 책을 접할 기회가 그리 없었던 탓에,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어요.

  • profile
    윤주[尹主] 2012.11.12 08:01
    잘 봤습니다~ 예전에 같은 제목 단편 올리셨던가요? 예전 글을 새로 고쳐 쓰신 건줄 알고 반가워 읽었는데, 다 보고 나니 확신이 안 드네요;;
  • profile
    욀슨 2012.11.12 08:14
    며칠 전에 전체 내용으로 한번 올리기는 올렸었는데, 영 불만족스러워서 다듬고 있어요. 막상 파면 팔수록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게 되어서 곤란하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rofile
    yarsas 2012.11.17 07:30
    욀슨 님 묘사가 너무 좋아요. 많이 배우고 갑니다.
  • profile
    욀슨 2012.11.18 12:15
    조금 과하다 싶었던 적도 있기는 한데,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yarsas님께 배울 점이 더 많기는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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