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4 02:53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4)

조회 수 402 추천 수 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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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여자에게 뺨을 맞은게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도 네가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건 왜일까? 누구에게 맞았는지 볼 수 없어서? 그녀가 심한 소리를 하던 게 하나도 듣지 못해서?


 그 이상한 여자가 누군지는 금방 밝혀졌다. 주리가 무심코 다이어리에서 흘린 사진에 그 여자도 찍혀 있었으니까. 사진에 찍힌 인물 정도는 너도 볼 수 있다. 너는 사진에 찍힌 주리 미모를 장황하게 칭찬한 뒤 그녀에 대해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녀가 누구건 네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주리는 그녀가 자기 절친이라고 했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나와 주리를 만나러 카페에 간다. 어느샌가 네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 있다.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일까?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어쨌건 그녀는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이면 늘 같은 자리로 와서 너와 냅킨 메세지를 주고받는다.


 카페 안은 여느 때와 변함없어 보인다. 커피향이 진동하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몇몇, 공부를 하는 사람이 또 몇몇. 항상 앉던 자리로 너는 걸음을 옮긴다. 자리는 평상시와 조금 달라져 있다. 누군가 막 일어나 떠난 듯 의자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는 냅킨 한 장이 올려져 있다. 너는 습관처럼 그것을 주어들어 읽는다. 글씨체가 낯이 익은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설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앞으론 만날 수 없어요.... 기다리지 말고 가세요...'


 냅킨 두 장에 이어 장황하게 적힌 내용 중에서 세 문장이 유독 눈에 띈다. 너는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서 움직일 줄 모른다. 어째서? 네가 묻는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아무도 없는데도.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이 심하게 흔들린다. 바닥뿐 아니라 벽, 천장 등등 그가 볼 수 있는 모든 게 일제히 진동한다. 심지어 하늘조차 무너져내릴 듯 흔들거린다. 그래도 너는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 진동은 더욱 심해져 어떤 곳은 아예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카페 천장 한 구석이 무너져내리더니 카운터 위에 놓인 화분이, 진열장에 놓인 접시들이 일제히 쏟아진다. 유리창은 액체처럼 녹아서 흘러내린다. 바닥엔 조금씩 균열이 생겨 서서히 커져만 갔다. 이 모든 게 전부 네 시각에서만 일어나는 일임을 너는 알지 못한다.
 너를 둘러싼 모든 게 너를 향해 무너져내리려는 찰나, 무슨 생각에선지 너는 돌연 그곳을 뛰쳐나간다. 기둥이 통째로 무너져내리고, 천장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너는 그것을 어깨로 받고 팔로 쳐내며 달려나간다. 멀찍이서 주리가 누군가와 말다툼하는 게 언뜻 보인다. 상대는 그녀의 절친이라는 바로 그 여자다.

 "너 왜 그래! 걔가 불쌍해서 그래? 동정이라도 가디? 아니면, 네 처지가 걔랑 비슷해 보여서?"
 "그거 아니라니까!"
 "정신차려라 민주리. 그 바보 같은 녀석한테 매달릴 필요 없다니까?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래. 네가 걔 몰골 보질 못해서 이러나본데, 걔 너랑 안 어울려. 수준 차이난다고! 솔직히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 없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런 애랑 만나? 바보야? 너도 걔처럼 어디가 좀 부족해?"
 "부족하지 않아, 그 사람."


 주리는 딱 잘라 그녀에게 말한다. 여자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주리는 제 얘기를 계속한다.


 "그 사람, 그래. 네 말대로 좀 불쌍하긴 해. 평생 사람이라곤 나 말고 본 적도 없대. 먼저 얘기걸어본 적도 없고, 남 얘기 들어본 적도 없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아, 다른 사람들은 죄다 저렇게 보이는구나.'하고 생각한대."
 "그러니까, 그런 게 뭐가 그리 좋냐고."
 "근데 난 불쌍하단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나 세상이 모질게 굴어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을 사람이야. 그 사람 하는 얘기 듣고만 있어도 기운이 나. 나 같은 게 기껏 하는 고민 따위, 그 사람 고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이제껏 불평만 하고 있었던 게 부끄러워져. 그런 사람 격려를 받으면 정말, 나 자신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같아 기분이 좋아져."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쳐. 근데, 넌 그 사람 안보인다며? 너한텐 그 사람 이 세상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투명인간같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니, 넌?"
 "그 사람은 분명 여기에 있어."


 주리는 들고 다니는 가방을 연다. 제법 두꺼운 앨범 한 권을 꺼낸다. 매 장마다 빼곡히 꽂혀 있는 냅킨 백여 장을 친구에게 내민다.


 "이게 그 사람이 있단 증거야. 그 사람이 처음 내게 걸어온 말, 처음 그가 내 고민해 대해 조언해줬던 얘기들, 전부 여기 있어. 가끔 힘들면 한번씩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 보곤 해. 그가 하는 얘기는 언제 보던 기분 좋아. 그가 쓰는 손글씨체가 맘에 들어. 무엇보다, 이런 따뜻하고 선량한 사람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하나만을 바라봐준다는 그 사실이 과분하게 여겨져. 너도 그랬잖아. 평생 자기만을 봐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남자, 사랑할 가치 충분한 거 아니니?"


 친구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리는 앨범을 가방에 집어넣고 그녀에게 말한다.


 "나 갈께. 그 사람이 기다릴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친구가 묻는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먼저 가서 냅킨에다 적어놨다고. 더 이상 안 만나겠다고, 네 글씨 따라적었단 말야. 그런데도 그 사람이, 널 기다려줄까?"
 "...아까 그 얘기 듣고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어."


 직접적인 대답 대신 주리는 다른 소리를 했다. 친구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 덕분에 친구는 주리를 향해 달려오는 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툴디서툴게 몸부림치며, 비명에 가까운 외침으로 주리를 부르는 네 모습을 그녀는 분명하게 바라본다. 저 바보같은 게. 친구는 손으로 제 얼굴을 짚는다. 어째선지 그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사실 벌겋게 달아올라야 할 얼굴들은 정작 따로 있는데도.


 "사랑합니다! 주리 씨! 정말로,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설령 제가 당신이었대도, 당신이 저였대도 마찬가지로! 그래도 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요. 당신도 그랬으니까!"
 "그 얘기 듣고 화가 났단 건,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단 얘기 아니겠어?"
 "...이 바보 커플 같으니."


 내가 졌다. 친구는 그렇게 말했다. 주리 어깨에 손을 올려 몸을 돌려 세우곤, 친구는 그녀에게 말한다.


 "그 남자, 카페에서 이쪽까지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면서 달려오고 있어."
 "어? 어??"
 "아, 넘어졌다. 암튼 저 꼴사나운 놈, 정말."


 완전히 무너져내린 세상에 깔려 짓눌린 너를 친구는 한심하단 듯 쳐다본다.


 "가봐. 이제 보니 두 사람 자알, 어울리네. 대낮부터 바보 짓, 낯뜨거운 짓. 괜히 끼어서 나만 무슨 고생이야? 두드러기 생길라."
 "왜? 뭐야?"


 자, 자. 친구는 주리 등을 떠밀었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주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친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잠자코 그녀가 향하는 걸 지켜볼 뿐이다.


 주리가 카페를 향해 다가갈수록, 점점 더 너와도 가까워져간다. 너는 몸을 일으켜보려 하지만 꼼짝없이 묵직한 무언가에 눌려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너는 소리를 질러 그녀를 불러 보지만 주리는 네 말을 듣지 못한다. 그 와중에 너는 제 몸에 찾아온 이상을 깨달은 모양이다.


 "주리 씨...어째 모습이, 점점 더 흐려지는 게..."


 아무래도 네게 내려진 기적이 서서히 약해져가는 모양이다.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다. 기적은 사람들 생각처럼 만능인 게 아니니까. 네가 만일 이 모든 것, 그녀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모든 게 기적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런 기적이란 게 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나와 그녀가 사랑하게 되면 안 되는 거냐고.


 기적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란 말이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기적이고, 가능성이 사라지면 기적 역시 사라진다. 네가 주리를 보고 듣게 된 것도 주리를 만나게 된 것도 기적 덕분이지만, 너와 주리가 이대로 영영 서로를 만나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기적 역시 사라져 주리를 영영 보고 듣지 못하게 된단 뜻이다. 물론 또 한 번 기적을 발휘해 너를 구하고, 주리와 네가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문제는 없다. 내가 고민하는 건, 앞으로 발휘할 수 있는 기적은 단 한 번뿐이란 거다. 두 번도, 세 번도 아니고 딱 한 번뿐. 게다가 마지막 한 번은 그냥 발휘되는 게 아니라 내 목숨도 같이 걸어야 발휘되는 것이다.


 방법은 분명 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너와 주리가 서로 사랑하는 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일까? 너희 두 사람 이외 나라는 목숨 하나 더 희생해가면서 얻어야 할 정도로 가치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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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입니다. 윤주입니다;

 한동안 뜸했습니다;;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도 많고, 할 건 많은데 겁 많아서 지레짐작 물러서 있다가, 또 그것 때문에 아무렇게나 화내고...좀 정신 들고나니 2월도 어느새 끝나가네요.

 어쨌거나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 이래저래 돋는 4화 연재분입니다. 이제까지의 내용도 엉망이지만 이번 화 내용도 어느 구석 손대야할지 모를 부분이 잔뜩이네요; 아무튼간에,

 저 커플에게 준비된 엔딩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배드 엔딩, 하나는 해피 엔딩이죠.
 두 사람이 행복해져야 하는지, 아니면 여기서 서로 사랑하는 걸 끝마쳐도 될지를 결정하는 건 여러분 몫입니다...
 최종화는 여러분 댓글에 따라 해피 엔딩, 혹은 배드 엔딩을 선택해 올릴게요. 이번 주말까지 기다립니다^^;

 p. s. <시크릿>은 천천히 올릴 생각입니다. 다음주 월요일까지는 새로운 화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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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클레어^^ 2011.02.24 04:46

    에? 남자가 혹시 인간이 아닌 건 아니겠죠?

    그나저나... 윤주님~ 오랜만이에요~[퍼버버벅!!!!]

    아, 그러고 보니... 주리 씨 성이 다르네요? 지난 번에는 민주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서주리네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8:32

     음...성은 제 실수인 거 같네요;;; 어쩐지 쓸 때도 계속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틀린 걸 못 찾아내서;;


     인간인 '너'를 관찰하는 '나'는, 여기서 처음 나오지만 인간은 아니에요. 신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 profile
    시우처럼 2011.03.03 00:43

    음, 주리의 친구는 왜 주리와 남자의 만남을 싫어했던 거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어서? 오지랖이 넓어서?

    제 생각에는 주리 친구가 너무 쉽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해버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친구 몰래 남자에게 이별통보까지 할 정돈데말이죠.

    주리와 말다툼을 하던 친구가 감정이 격해져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화를 내며 떠나고

    앞으로도 종종 둘의 관계를 방해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조금 들었습니다.

     

    아무튼, 그저 저의 사견일 뿐이고요. 독특한 이야기, 독특한 시점의 변화! 역시 윤주님~! 

  • profile
    윤주[尹主] 2011.03.03 08:01

     짧은 글이라 좀 억지스럽게 가볼까 생각도 하고, 사실 이런 표현 익숙지 않아 귀찮기도 했네요;;

     역시 읽는 사람 앞에선 다 티가 나는 거 같아요. 글을 쓰는 자세같은 건 ㅠㅠ


     시점은 뭐...눈속임이죠; 1인칭이지만 1인칭이 아닌 양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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