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9 07:24

오로지 그녀뿐인 세상 (3)

조회 수 433 추천 수 1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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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여자가 침착함을 되찾자 너는 통성명을 시도한다. '조 건우'.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는 여자 질문에 네가 답하듯 적은 세 글자. "저는……." 여자는 입을 잠깐 동안 떼었다가 이내 어색해한다. 어설프게 다문 입술 대신 그녀 손이 그만큼 분주히 움직여 펜을 종이 냅킨 위에 굴린다. '민 주리예요.'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여자 이름이다.


 서로 쭈뼛대며 주고받은 통성명 뒤에 너희는 무슨 얘길 했던가? 먼저 네가 몇 마디인가를 건네고, 다시 여자가 그것에 답했다. 그런 때면 흔히들 입버릇처럼 꺼내는 얘기들, 이를테면 날씨 얘기라던가,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얘기 따위를 꺼냈던 것 같다. 결론이 뭐가 됐건 좋을 얘기들을 가장 먼저 꺼내는 건, 상대가 어느 순간 내 눈 앞에서 문득 사라지더라도 후회하거나 실망하지 않으려는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소극적이었던 그녀가 어느 순간 너와의 대화를 즐기게 된 이유도 어쩌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래도 좋을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내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넌 그녀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애초부터 넌 그녀에게 보이지도 않았으므로.


 '건우 씬 무슨 일을 하세요?'

 '번역가…….그 비슷한 일이에요.'

 '와, 그럼 외국소설도 많이 보시겠네^^'

 '그건 아니고요;; 일단은 양식 문서라던가, 제품 카탈로그 따위를 통번역하고 있어요 ㅎ'

 '그렇구나.. 일은 그럼 집에서 주로?'

 '네. 일부러 집에서, 사람 안 만나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주리 씬 학생이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대답해드리면 용서해주실래요? 사흘 정도 주리 씨 스토킹한 거 ㅎ'

 'ㅋㅋ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라면서요'


 키읔 두 글자를 적으면서 여자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아무래도 그 웃음은 전염성이 있는 모양이다. 여자를 보면서 너 역시도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한 걸 보면.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내다보니 자연스레 가족 얘기가 나왔다. 누구와 사냐는 여자 질문을 너는 꽤 오랜 시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다. 여자가, 자기가 던진 질문이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단 사실을 알아챌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작년에 어머니 얼굴을 처음 봤어요.'


 여자가 뭔가 적기 전 네가 먼저 펜을 들었다. 한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는 다음 문장을 이어 적었다.


 '심장마비였대요. 어머니께서 쓰러졌을 때, 저도 그 방에 있었거든요. 쿵, 소리가 나긴 했는데, 어디서 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소리만 빽빽 질러 엄마만 찾아댔어요. 평소 때면 금방 달려와 어깨에 손을 올려주곤 했던 어머니가, 어째서 그날은 아무 기척도 없을까 하면서요. 옥탑 방이나 다름없는 그 방에 식구는 저랑 엄마, 아버지가 다예요. 아버진 택시 운전하다 항상 저녁 늦게 들어오시고요.'


 이어 두 번째 장.


 '저녁이 되니까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누군가 누워있는 게 보이더라고요. 실제로 본 건 생전 처음이었어요. 사진으론 몇 번이고 봤지만요. 하긴 사진보단 훨씬 나이 들어 보였죠, 제 어머닌. 숨은 쉬지 않게 된 지 한참이었고, 몸도 조금씩 식어가던 와중이었어요. 그러니까 볼 수 있었던 거예요. 이미 죽은 몸이니까, 사진이나 장롱 같은 물건이나 다름없으니까.'


 여자는 쉽사리 뭐라고 얘기하지 못한다. 너는 여자 표정을 살핀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젖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네가 적은 쪽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바라본다. 다른 사람 불행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지. '죄송해요, 이런 얘기 하는 게 아닌데.' 손수건 위에 쪽지를 올려 너는 그녀 쪽으로 밀어 보낸다. 여자는 미안하다고, 입으로 몇 번이고 말했다. 그것보다 네게 위로되는 것도 없으리라.


 '좋은 분이셨어요. 부모님 두 분 다. 이런 저를 계속 키워 주셨으니까. 두 분이 제 상태를 아시게 된 건 제가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대요. 손에 들고 흔드는 모빌을 따라 움직이던 눈동자가, 눈앞에서 정신없이 흔드는 사람들 손에는 전혀 반응을 안 하더래요. 처음엔 어딘가 모자란 아이 아닌가, 병원에서 검사해보잔 말도 있었대요. 다운증후군이니,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도 부모님께선 저를 평범한 애들처럼 키워주셨어요. 보이지 않는 거 하나 없는, 다른 애들이나 마찬가지로요.


 오히려 제 자신은 불안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 게, 저한텐 태어나서 처음 본 세상이 벌써 이 모양이잖아요? 어머니께서 제 몸을 안아 들면, 물론 제 눈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몸이 떠오른 양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원래 세상은 그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저한텐 TV가 부모님 다음으로 고마운 존재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알려 줬으니까요. 참 신기한 눈이죠? 자기 눈으론 암만해도 볼 수 없던 세상이, TV 화면을 통해선 보이니까요.'


 '답답하셨겠어요. 부모님 볼 수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셨을 테니까.'


 비단 부모님뿐일까. 그녀가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네가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녀 생각이 대체로 일리가 있지만, 딱 하나 틀린 게 있다.


 '대화는 자주 했어요.'

 '어떻게요?'


 여자 얼굴에 놀란 기색이 나타난다. 너는 실실 웃는다. 장난기가 일었는지, 너는 슬쩍 여자에게 묻는다.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여자는 한참 생각하는 듯했지만 대답하진 못했다. 조금 후 네가 답한다.


 '마이크를 쓰면 돼요.'

 '네?'

 '가끔 있잖아요, 트럭에 물건 실고 다니면서 파는 아저씨들. 언젠가 거기 주변을 지나는데, 트럭 안에서 한참 마이크를 잡고 손님을 끌던 아저씨가 저랑 손을 잡고 나온 어머니를 본 거예요. '아주머니, 이쁜 애기 봐서 싸게 드릴께!' 그것 때문에 알았어요. 비록 저는 남들 못 봐도, 남들은 제 모습 다 보고 있단 거. 근데 어머닌 저랑 다른 데 생각이 미치셨나봐요.


 집에서 어머닌 라디오 한 대랑, 어디서 구하셨는지 마이크를 하나 꺼내오셨어요. 사람 목소리만 듣지 못할 뿐이지, TV도 보고 라디오도 듣고 하는 덴 아무 문제없었으니까, 어머니께서 그걸 잘도 알아채신 거예요. 그날 처음 들었어요, 엄마 목소리. 아버지 목소리도.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긴 했지만, 그게 어디에요? 안 그런가요?'


 '정말 기발한 생각이네요.'


 여자는 적잖이 감동한 듯하다. 그녀 얼굴을 보며 너는 흐뭇이 미소를 짓는다.


 편지 쓰는 사람도 줄어든 요즈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상대와 나누는 필담이 너와 그 여자에게 낯익을 리 없건만 몇 번인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자 너희는 금세 이런 방식에 익숙해졌다. 게임이나 채팅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해하던 여자는 점차 호기심을 보였고 이제 완전히 이 냅킨 메시지 주고받기에 적응했다. 하고 싶은 말을 작게 입으로 중얼거리며 손으론 냅킨 위에 그 말을 천천히 적어 내려가는 여자를 너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는다. 오후 햇살이 창밖에서 쏟아져들어 윤기 있는 여자 머리칼과, 턱을 받친 팔과 어깨를 비추며 금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너는 흡사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칠 것만 같다. 멈추어라, 너는 아름답다.


 여자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대답 대신 너는 테이블을 툭툭 두 번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두 번은 Yes, 한 번은 No. 굳이 냅킨 이외 의사소통 방법을 만든 건 불편함을 느껴서가 아니다. 될 수 있는 한에선 여자에게 자신이 분명히 여기 있단 걸 알려주기 위한 네 나름의 방법이라는 편이 더 옳겠다.


 여자가 자리를 비우고, 너는 그대로 남아 여자를 기다린다. 맞은편 여자 자리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는 눈치다. 막연히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설렘까지도 네게는 즐거움인 걸까?


 마른하늘에도 간혹 날벼락은 떨어진다. 네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지금 이 순간, 난데없이 찾아와 네 뺨을 때리는 저 여자처럼. 찰싹, 큰 소리가 났기 때문에 카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일제히 네 쪽을 돌아본다. 너는 맞은 뺨을 감싸 안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대지만 네 눈에 보이는 거라곤 카페 의자와 테이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인테리어 장식들뿐이다.


 네 뺨을 때린 여자는 잔뜩 화난 듯 보인다. 그녀가 소리를 지른다. 네가 뭔데 주리한테 치근 대냐고. 어디서 굴러온 바보새끼가 함부로 나대느냐고. 너 같은 병신이 주리한테 뭘 해줄 건데? 그녀는 심한 소리를 서슴지 않지만 너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한 듯 반응이 없다. 애당초 네게 있어 그 여자는 이 자리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점원이 만류하는 통에 여자는 카페를 나갔다. 문을 나서면서도 여자는 기어이 한 마디 툭 던지고 만다. 두고 봐. 여자가 던진 말보다 네게는 그녀가 카페를 나서면서 문을 세차게 쾅, 하고 닫은 그 소리가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너는 한참 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무얼 생각하는 걸까? 방금 뺨을 때린 게 누구냐는 거? 주리란 여자와는 무슨 관계일까 하는 거?


 얼마 되지 않아 주리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묘한 시선을 보내는 걸 의식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는 네 맞은편 자리에 평소처럼 앉는다. 네 얼굴을 본 그녀가 놀라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당황한 나머지 냅킨에 적지 않고 입으로 직접 외쳤지만 네게는 상관없다. 어차피 넌 그녀 모습도, 그녀 목소리도 다 보고 들을 수 있으니까.


 '어디에 부딪치기라도 한 모양이에요'


 대답 대신 네가 그녀에게 넘겨준 냅킨엔 그렇게 쓰여 있다. '다치진 않았어요?' 그녀가 다시 묻는다. '괜찮아요.' 그리고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요.' 네가 남긴 답변.


 세면대에서 너는 물을 받아 머금고 입 안을 가볍게 헹군다. 퉤, 하고 네가 물을 뱉는다. 붉은 피가 물에 희석되어 세면대 위에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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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오자마자 올리는 글입니다^^  늦게나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ㅎ

 저번 화 설문을 참조해서 되도록 궁금해하셨던 내용들이 들어가도록 대화를 꾸며봤습니다. 원하시는 내용이 다 들어갔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이번 화도 설문조사 기획하려 했는데, 좀 재미있는 지문이 안 떠오릅니다;; 과연 뒤늦게 나타나 뺨을 때리고 지나간 여자는 누구였을까요, 하는 설문이었지만서도...


 <시크릿>은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올릴게요. 당분간은 다른 분들 올린 글 먼저 읽은 다음에 ㅎㅎ

?
  • profile
    클레어^^ 2011.02.10 04:31

    뺨 때린 여자의 정체는 주리의 베스트 프렌드 또는 언니 아닐까요?

    그나저나 오랜만이에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0:47

     오, 정답 ㅎㅎ

     클레어님 글도, 댓글도 이제야 읽기 시작했네요;; 이래저래 죄송합니다;

  • profile
    시우처럼 2011.02.11 06:11

    크헝 사실, 이게 좀 헷갈리네요.

    남자는 세상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여자만을 볼 수 있는 거고

    여자는 다른 사람들 눈엔 다 보인 남자를 볼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여자는 어떻게 남자한테 무슨 사태가 벌어진 걸 알게 된거죠?

    으음, 다시 한번 읽어 봐야겠네요.

     

    아참, 그나저나 윤주님은 고향엔 잘 다녀오셨습니까? ^^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0:46

     남자가 여자를 먼저 보고 말을 걸었다, 그걸로 설명이 충분할지 모르겠네요;;

     답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 ?
    모에니즘 2011.02.18 17:14

    아직 내용이 해깔리는 걸로 봐서는 저는 아직 미숙한 것 같네요.

  • profile
    윤주[尹主] 2011.02.27 00:45

     내용이 헷갈리는 건 순전히 작가의 잘못입니다;

     좀 급히 쓴 글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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